벌써 다섯번째 숙소 이사. 정말 번거롭다. 번거로운만큼 도가 텄는데 이런 도는 트고싶지 않다. 그 때 그 사람은 이사가 지긋지긋한 나머지 매년 인사발령철마다 또 이사갈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우울증 약을 먹을 지경이라고 했었다. 나는 그 사람의 꽹가리처럼 징징대는 소리를 들으면서 태연히 "이사가면 기분좋은데 뭘 그렇게"라고 생각했었지만, 그 사람만큼 나이를 먹어보니 --- 알겠다, 나도. 얼마나 지겨운지를!
집에도 기운이라는 것이 있는게 분명하다. 이번 숙소는 기운이 별로여서 하루라도 빨리 뜨고 싶은 곳이었다. 보면 볼수록 최면에 빠질 것 같았던 환 공포증 유발 벽지 때문이었을까.
"탁 트인 전망"은 맞았으나 왜인지 볕은 늘 부족했고, 방 안에서 대략 18개의 다리가 달린 듯한 투명벌레와 조우하기도. 어쩌다 놀러왔던 우리 고양이가 밤새 한숨도 자지 않고 내리 울며 방안을 초조하게 왔다갔다 하던 이유가 분명 있었을테다. 그래도 거의 1년동안 드나든 곳이었는데, 아무튼지간에 집을 나오면서 "고마웠어, 잘 지내다 가" 라는 인사없이 후닥닥 짐을 뺀 곳은 여기가 처음.
새벽 한 시까지 이사를 치르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진해로 출발. 이 컨디션으로 가능할까 싶었지만 진작에 등록한 진해마라톤 5km 달리기 때문이다.
이번에 뛰려고 스페어 러닝화 솔라부스트도 사고 (마치 강원도 오지에서 눈 속에 신는 설피처럼 밑창이 넓적하다), 모처럼 주중에 퇴근런도 하며 준비를 했던 것이다.
해군사관학교 영내를 달리는 흔치 않은 기회를 눈 앞에 두고 배번이 본가로 배송되는 바람에 없어서 못 들어갈 뻔 했는데 조직운영위에 사정 사정해서 입장했다. 도와주신 장교 선생님께 감사 😊
이런 풍경을 옆에 끼고 바다에 정박해 있는 군함도 코 앞에서 보며 달릴 수 있었다. 나름의 심기일전으로 35분에 5km 피니시를 끊고 완전히 기진맥진. 기념품으로 받은 빅 사이즈 초코파이와 바나나를 거지왕 춘삼이처럼 허겁지겁 먹었지만 - 발전된 나의 러닝에 마음만큼은 도날드 트럼프!
올 여름 나카메구로에 갔다가 발견한 평행이론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 일본에 나카메구로가 있다면 한국에는 여좌천이 있다는 사실. 진해에 간 김에 여좌천에 들렀다. 두 곳의 사진을 놓고보면 어디가 여좌천이고 어디가 나카메구로인지 구별이 어려울 정도.
(정답: 위가 나카메구로, 아래가 여좌천)
나카메구로 천변에는 한번쯤 취향껏 살아보고 싶게 만드는 오래된 콘도미니엄들이 많았는데,
(이건 나카메구로,,)
여좌천 주변에도 그에 못지 않은 아우라의 오래된 연립주택이 있고
기이할 정도로 하얀 아파트가 줄지어 있어서, 무언가 범상치는 않아보여 검색해보니 역시 나의 촉이란 - 해군아파트.
한글만 없다면 여긴 진해가 아닌 그냥 나카메구로.
(물론 이건 다 여좌천이다)
차이가 있다면 나카메구로에는 아시아 유일의 스타벅스 로스터리 카페가 있어서 나카메구로를 나카메구로하게 만든다는 것인데 - 개인적으론 스타벅스 로스터리라고 해서 뭐 대단한 감흥은 느끼진 못했고 사람 참 많다는 인상만 받았다. 일본이나 우리나 사람 수가 줄어 아쉬운 상황이니 사람많다는 것이 중요.
(이건 올 여름 나카메구로의 스타벅스 로스터리)
한국의 나카메구로를 조금 걷다가 비빔밥을 먹었는데 약간 짰다. 후식으로 마롱티라미슈를 먹었는데 너무 달아서 중간에 포기. 단짠인지 짠단인지 나른하고 따뜻한 시간은 참 빠르게 지나간다.
일요일에는 광주에 가서 예배를 드렸다. 우리나라에서는 동서간 이동을 할 일이 잘 없는데, 영남에서 호남으로 동서간 질러가는 직선 경로를 타게 되었다.
영화 곡성 때문에 전남 곡성만 가면 무슨 사연이 있는 것 같다. 돌아오는 길에 자동차 충전을 하려고 곡성 휴게소에 들렀다가 한 시간을 허비한 것은, 뭣의 장난에 걸려든 것인지. 그냥 있는 나무마저도 상서로워 보이는 곡.성.
11월도 중순에 접어드는데 남부지방의 산들은 아직도 푸릇합니다.
눈 앞에는 온통 회색구름이지만 지나온 뒤를 보니 파랗게 하늘이 개고 있다. 지나고 돌아보면 좋은 것만 남는 우리의 기억처럼.
그렇게 주말 하루는 동쪽에서, 하루는 서쪽에서 버닝하다보니 저녁이 되었다. 서울에서 살지 못함으로써 갖지 못하고 넘볼 수도 없게 된 것들이 많지만, 그 댓가로 남쪽나라 여기저기를 예사로 쏘다니는 패기를 얻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
그런 패기도 어디에든 쓸모가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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