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개봉작 곤 사토시의 애니메이션 "크리스마스에 기적을 만날 확률"이 메가박스에서 재개봉한다는 기사를 보고 미리부터 예매를 해 두었다. '특별한 가족애'를 느낄 수 있는 걸작을, 이번에 놓치면 어느 OTT에서도 볼 수 없을 것이라는 말에 개봉 일정까지 미리미리 구글 캘린더에 저장해두고 있었다.
올해 극장에서 마지막으로 본 영화는 "파묘"였다. 열 달 만에 찾는 개봉관이 다행히 집에서 10분거리 메가박스 리클라이너관에 있었고, 토요일 조조로 관람한 덕분에 이것은 완전히 나의 개인 영화관.
영화는 정말 좋았다. 개인적으로 도쿄의 도시풍경을 애니로 보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어서 '언어의 정원'이나 '너의 이름은' 같은 실사급 애니를 몇 번이고 보는데, 이 애니메이션 속 도쿄의 풍경에는 또 다른 아련한 맛이 있었다. 우연이 필연으로 이어지는 전개가 늘어지지 않아 산뜻했고, 아하! 이게 그렇지! 하며 기분좋은 웃음으로 그 흐름을 따라갈 수 있었다.
게이 '아줌아줌씨'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가지고 매번 비장하게 하이쿠를 자작하여 읊어대는 장면은 감독의 의도대로 킹받게 웃겼다. 게이 아줌아저씨가 아기를 잃어버린 아기 엄마에게 아기를 되돌려주면서, "이 아이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니 많이 많이 사랑해주세요"라는 대사는 "다꾸상 다꾸상 아이시테 구다사이" 라는 일본어로 들으니 더욱 사랑스럽게 들렸다. 가출소녀인 미유키가 울면서 "키요코도, 미유키도, 이 세상에 단 하나야! 생명은 단 하나라고!"고 외치는 대사 역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그렇지. 모두가 단 하나지. 우리 모두는 대체 될 수 없는 단 하나의 희소한 존재이다. 그런데 우리는 비트코인의 희소성에 대해 생각하는 것 만큼도 우리 각 존재의 유일무이함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살고 있다.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토요일 오전의 시티뷰는 웬지 아름다웠다.
요새 나물에 꽂혀있다. 심지어는, 나물을 먹을 줄 아는 민족의 일원으로 태어나서 복이라는 생각을 할 정도. 나물을 편리하게 먹을 수 있게 포장해서 파는 제품이 많아졌다. 최근에 주문한 컨비니 나물은 먹기도 편리하지만, 정말 맛있다. 주말 내내 이 나물에 밥을 비벼먹었다.
내 인생 세 번째 탄핵을 보았다. 어떤 식으로든 빠르게 수습이 되어야 할 일이긴 하나, 세 번의 탄핵을 보아야 하는 이 나라의 현실이 슬펐다. 요즘 특별히 매일성경 말씀인 아모스를 무겁게 묵상하게 된다.
크리스마스의 계절이어서 그런지 왕년의 로맨스 명작 재개봉이 이어지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시애틀의 잠못 이루는 밤"이다. 밤늦게 개봉관에 가서 보려다가 번거로워 유튜브에서 1,200원을 내고 감상. 짤로만 보다가 풀 버전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보는 내내 맥 라이언의 착장이 너무 예쁘다는 생각만. 허리가 잘록히 들어간 하늘색 블레이저나, 네이비색 코트에 잔잔한 올리브컬러의 플라워 스카프는ㅜㅜ 정말 너무 예쁜 착장이었다. 그나저나 동거하다시피 한 약혼자 빌 풀만과 정리하자마자 바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으로 뛰어가서 톰 행크스와 처음 보자마자 손을 잡고 내려가다니, 지난 주에 본 세렌디피티도 그렇고 이렇게 즉각적인 환승이 미국에서는 대세였던 것일까.
메그 라이언의 착장만 돌려보는 내 곁에서 우리 고양이는 극한의 유연함으로 잠을 자고 있었다. 스트레칭 연습 천 번 만 번을 해도 나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할 자세.
나뭇잎의 그림자가 사라진 앞산에서는 떠오르는 해의 동그란 모습이 그대로 보이고
차가운 겨울의 러닝은 그 나름의 맛이 있는데, 몸이 더워지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달린지 5분이 지나면 등에서, 10분이 지나면 발바닥에서 온기가 순서대로 느껴진다. 달리기의 핵심 배기통이 다름 아닌 코의 숨에 달려있다는 것도 최근 깨닫고 있는데, 차가운 공기 속에서는 코의 숨에서 입의 숨으로 넘어가는 분기점도 조금 천천히 찾아오는 것 같다. 오전 러닝 4.8km를 마치고,
조금 더 부지런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싶어 거실 가구 배치를 바꿨다. 아무래도 영화만 계속 찾아보며 과거로만 돌아가려 하고 이국의 세계만 찾는 내 상태로 보았을 때 약간의 무기력증 증상인 것 같고, 극복을 위한 넛지가 필요한 듯 하여 좁은 방에 밀어두었던 책상을 거실 한복판으로 옮겨왔다. 이젠 조금 더 읽고 쓰고 공부할 수 있으리라 기대해본다. 손을 놓고 있는 채권 공부도, 주말을 묵직하게 채웠던 묵상 루틴도 다시 시작할 수 있기를.
인간의 결심이란 참으로 미약하여 한낱 한숨처럼 흩어지는 시간이 있기 마련이다. 때로는 흩어지고 흩어져서 흩어질 것이 더 이상 없을 때 까지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이 유일한 해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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