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특이점이 있는 날의 신문 1면을 간직하는데, 이번에는 조선일보가 사진을 정말 극적으로 뽑았다. 나의 시대에 이런 컷을 보게 되다니. 거의 풀리쳐급이다. 일이 벌어진 순간의 충격과, 이후 다가올 혼란에 대한 모든 것들이 이 한 장면에 다 들어있으니, 잘 접어서 캐비넷에 넣어두었다.
공교롭게도 나는 지난 주 부터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읽던 중이었고, 계엄의 이튿날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마저 끝냈다. 첫 페이지에 '또 광주이야기냐'며 심드렁해 했던 내 자신을 반성해야 마땅했다.
내게 있어 소설가들은, 하나의 새로운 유니버스를 창조해 낸다는 점에서 조물주와 다름 없을만큼 가장 경외하는 직업군의 사람들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더 나아가, 한 때 존재했으나 아프게 사라진 사람들의 혼에 관한 세계를 재건해내는 작업은 과연 어떤 작업이었으며, 그 작업을 해 낸 한강이라는 소설가는 어떤 일을 해낸 것인가.
작중의 문장처럼, 인간이란 극도로 잔인할 수도 또한 극도로 숭고할 수도 있는 존재이다. 그리고 때로는 그 잔인함을 나의 일상에서도 본다. 생각해보면 내게도 권력이란게 있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하고 싶은 말을 주워담게 만드는 힘이 내게 조금이라도 있다면,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상대가 먼저 인사하게 만드는 힘이 다만 얼마라도 있다면, 그 크기가 어찌되었건 그것은 권력아닌가. 쥐꼬리만한 권력도 권력이라고, 내가 가진 이 힘이 혹시 내게 먼저 인사하는 그 사람을, 내 앞에서 말을 주워담는 그 사람들을 겨누지는 않았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서, 성에 차지 않는다 해서 내가 쉽게 던지는 말의 칼들이 그러하지 않았던가.
생활 속에서 발현되는 나의 이 잔인함이, 누군가의 입에 복숭아를 넣어주던, 채석장으로 날아간 배드민턴 공을 서로 주워오라며 소란하던, 칠판지우개를 몰래 세워두고 누나를 숨죽여 웃게 만들었던, 햇빛이 비치는 곳으로 엄마의 손을 잡아끌던, 그 지극히 개별적이면서도 우주적인 순간들을 잔혹하게 삭제하고 파괴한 극악의 잔인함과 실상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은 아닌가. 거대한 역사를 논하기에 앞서 내 생에서 반복되는 그 원형을 보게 함이 내게는 이 소설이었다.
분리수거를 하러 내려갔다가 영하의 날씨에 버려진 책상 밑에서 비명치듯 우는 길고양이를 보았다. 나와 눈을 맞추며 우는 고양이 앞에서, 안돼, 감당못한다, 고 등을 돌려 단호히 돌아섰다가,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내내 고민 끝에 찬장 속 캔과 숟가락을 꺼내들고 다시 내려가서 텅 빈 책상 밑만 바라보는, 나는 그런 위인이다. 강한 편에 서야 한다면 가장 소극적이기를, 약한 편에 서야 한다면 가장 후미에서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나의 솔직한 고백임을, 이 소설이 던지는 거대한 질문 앞에 내 놓는 나의 부끄러운 답이다.
고양이들을 본가에 놓고 왔더니 캣타워만 덩그러니 서 있는 집이 적막하고 무얼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나는 혼자서도 잘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고양이들이 있어서 혼자가 괜찮은 것이었다. 말도 하나도 안 통하는 이 물렁물렁한 녀석들이 내가 돌아갈 단단한 집이었던 것인가 -
동네 약속이 있어서 느즈막히 나왔다. 좋아하는 비스트로에 대형 리스가 걸렸다. 나오니까 크리스마스 분위기. 그러나 화제는 여기저기 정치 이슈 뿐.
크리스마스는 웬지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의 로맨스 영화에 나오는 뉴욕 시애틀 맨해튼 갬성을 따라갈 수가 없다. 영화 속의 일들이 내 인생에도 곧 벌어질 것이라고 믿었던 내 전성기 시절의 크리스마스여서 그럴지도. 오늘 EBS에서 보내준 세렌디피티의 말도 안되는 장면을 보며 오지 않을 어떤 것을 여전히 기다리는 내 자신을 화들짝 발견한다. 낭만도 못 고치는 병이다.
이번 주에는 예쁜 것을 많이 질러댔는데, 손꼽아 기다리던 오리고 스프레드가 드디어 도착했다. 사진보다 실제 색의 명도가 떨어져서 마음에 혼쾌히 들진 않지만 오래된 소파에 두르니 그래도 웬지 연말 분위기가 난다.
또한 기다렸던 것은 블루보틀 윈터블렌드 홀빈과 크리스마스 시즌 한정 머그잔! 다크한 초콜릿 풍미와 블루베리의 상큼한 느낌이 어우러졌다고 하는데, 지난 주 까지 먹던 탄자니아 AA가 루이 암스트롱 처럼 긁는 맛이었다면 이건 완전 시티팝스러운 극강의 부드러운 맛이다! 사은품이 자그만치 SEOUL 에코백. 뜬금포로 덧붙이자면, 개인적으로는 동네의 민도를 가늠하는 지표가 블루보틀의 입점여부라고 보는데 - 내가 사는 이 신도시에는 오늘만 살고 내일은 없는 듯 아무것도 아닌 일에 눈을 부라리는 남자들이 곧잘 눈에 띄고, 당연히 블루보틀 같은 건 없다. ㅎ 다들 소설도 좀 읽고 풍미좋은 커피를 좀 마시면 민도도 괜찮아지지 않으려나.
주중 러닝은 안해도 될 일 했다는 갓생 스코어 따는 느낌인 반면 주말 러닝은 안하면 할 일 안 한 듯 패널티의 느낌이 있다. 할까 말까 수십번은 고민하다가 달려나갔다.
토요일 밸런스 없는 맥주로 다음날 깨질듯한 두통에 고생. 입맛을 돋우고자 콩나물국밥을 직접 끓여보았다. 다시마 멸치포로 국물을 내고 황태채 투척 + 콩나물과 김치, 파 청양고추 다진마늘 삼총사 투입 후 새우젓, 국간장, 천일염, 멸치액젓으로 북치고 장구치고 하다가 수란인 척 하는 수란까지 넣어서. 그러나 결론은 황태 대신 오징어를 넣었어야. -,.-
밀린 페이퍼들 숙독하랴, 고양이 화장실 청소하랴, 내 화장실 청소하랴, 웃자란 고무나무와 홍콩야자 가지치기 하고 물주랴, 급 정신없는 주말 마무리를 하고
3년 후에 집 지어 올리기, 그에 필요한 자금 1억을 최단시간 모으기, 3년 내에 자격증 따기, 내가 좇는 일들은 다 이런 류 - 창고에 무언가 더 쌓고 채우기 위한 탐심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3년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을 돌아볼 것이며, 누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겠다는 계획 따위가 왜 내겐 없는가. 얼마만큼 사랑할 수 있으며, 어디까지 사랑해야 인간일 수 있는지, 정작 물어야 할 이 질문을 탐심에 가로막혀 가지지 못한다면 - 내 삶은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잔혹해 질 것이다. 그 잔혹의 습성을 알기에 예수님도 말씀하셨을 것이다. 삼가 탐심을 물리치라고,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소년이 내게도 온 것 같은, 그런 주말이었다.
'주말기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12월 넷째주_아팠다 (0) | 2024.12.22 |
---|---|
12월 셋째 주_비디오 천국 (0) | 2024.12.15 |
12월 첫째주_김치와 더불어 담아가는 것들 (0) | 2024.12.01 |
11월 넷째주_파워I의 생각주말 (0) | 2024.11.24 |
11월 셋째주_ 핏에 관하여 (9) | 2024.1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