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기록

12월 첫째주_김치와 더불어 담아가는 것들

썸머에디션 2024. 12. 1. 20:14

불과 한 주 전의 가을 풍경이 삭제되고 거실에 시베리아가 등장했다.



경기도민에게 서울 출퇴근은 화창한 봄날에도 몸이 축나는 일이다. 그런데 하늘이 열려 대설이 쌓인 아침의 출근이라면.  한 시간 만에 등장해서는  당신이 탈 자리는 없다, 라고  매정히 떠나버리는 버스의 뒷꽁무니를 보며, 흥남철수 당시의 피난민들 심정이 이런 것 아녔을까 주제넘게 생각해본다.



서울로 갈 수 있는 단 하나의 구원의 문을 찾기 위해 도보이동을 결단! 습설의 무게를 못 이기고 꺾어진 가로수를 지나 고꾸라지고 자빠지며 설국을 횡단하고 나니, 금요일 퇴근 후에는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게 되어 버렸다.




토요일 정오가 다 되어서야,  하루가 지난 스타벅스 샌드위치와 드립커피로 대충 때우며 몸을 움직였다. 모처럼 커피를 홀짝이며 단편소설집을 읽었다. 



늦잠자는 마짱을 보며 병렬주차 중인 고양이들.




인스타를 넘기다가 우연히 접한 작가의 문장. "지치고 막막할 때 마다 눈을 감고 기도했다. 하나님 지혜를 주세요 잘 쓰고 싶어요. 더디게 주심에 감사드린다. 나는 여기서부터 다시 쓸 수 있을 것 같다."라는 문장에서, 비록  매일 실패하나 폭망한 그 자리로부터 오직 은혜로 다시 살 수 있다는 나의 마음을 보았다. 이렇게 신앙을 고백하는 소설가는 근래 처음 보았고 그 글이 궁금하여 곧장 주문한 책이, 서유미의 "밤이 영원할 것 처럼"이다. 격정적인 기승전결 없이 마치 수필같이 읽히는 단편이었다. 누군가의 삶과 마음을 미세하게 들여다보면, 곧 내 마음 내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듯한, 그 작은 세계들이 좋았다.




눈이 채 녹지 않았지만 러닝을 오래 쉬고 싶진 않았다. 천천히 가보는 러닝, 역시 곳곳의 길이 제빙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라데이션 없이 계절이 바뀌는 통에 가을단풍과 설경이 오버랩 된 진귀한 풍경들.




본가에 김장이 있었다. 엄마는 100포기의 배추를 주문하고 비장하게 대기 중이었다. 이번에는 김장 레시피를 전수받을 작정이었다. 내 주위에 겉절이는 물론이거니와 김장을 담근다는 사람도 거의 없기에, 지금으로부터 이삼십년만 지나면 김장 손맛을 가지고 있다는 게 굉장한 능력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갈은 무, 다진 무, 다진 생강 한 통,  다진 마늘 한 통, 파와 쪽파, 까나리액젓 콸콸콸, 간 새우 툭툭, 새우젓, 매실청 쫄쫄쫄, 설탕 팍팍, 고춧가루 팍팍, 갓을 갑자기 한 됫박, 풀 쑤운 것 두 양동이, 생굴 갈아서 넣고 사이다도 콸콸...잔소리말고 비벼!


레시피를 전수받으려 했는데 의성어와 의태어 외에 달리 표현될 수 없는 계량법이었다. 가만보니 비결은 그저 주저함 없는 과단성과 정확한 직관력말고는 없다.  26살에 김치없는 밥상을 상상할 수 없는 집으로 시집을 와서 단순계산만으로도 이제 44번째 김장을 하는 엄마이니까 가능했겠지. 어쨋든 엄마는 최소 94살까지는 김장을 해줄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양념을 바르던 아버지가 벌러덩 넘어지시자, 엄마는 '당신은 고만해라, 나중에 손가락 아프다 허리 아프다 하지말고 이제 그만들어가라'고 반 타박+반 걱정을 했고, 가만히 듣고 있던 우리 조카들이 "할머니 츤데레"라고 속삭이자, 할아버지는 "순대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하는 답 없는 시간을 지나



작업반장 어머니의 치밀한 사전준비 덕에 신속하게 작업을 끝내고 마침 준비해 간 양촌 우렁이쌀 청주를 곁들여 수육을 먹었다. 누군가는 닷사이 23에 견줄 수 있는 한국의 술이라고 하는데, 가족들 모두 이렇게 깔끔하고 가볍고 부드럽냐며 호평 일색.




100포기 김장 옆에서 조카들은 레고 김장을 벌여놨다.  알리 블프에 혹해서 구입한 CADA의 일본 심야식당과 일본 찻집인데 조카들에게 제작을 발주한 상황. 이 레고 김장이 오후 네시까지 이어지고 맨  바닥에서 집중하던 식구들은 무릎과 뒷목이 펴지지 않는 좀비가 되어버렸다.


완성된 심야식당의 디테일이 꽤나 훌륭해서 내가 이번에 다녀온 도쿄맛집 사진이라고 뻥을 쳐도 될 정도이다.





찻집은 2층까지 올리다가 블럭 1개의 행방불명으로 완공을 못하고 철거했다.




공부 압박 너무 받지 말이라, 그거 하나도 중요치 않다, 대학교는 아무데나 가도 된다, 중요한 것은 신앙적 야성과 비전이라고 나와 동생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이모 어떻게 대학교 안가도 된다고 말해, 라고 큰 조카가 말했고, 너는 내 자식이 아니고 조카잖아, 라고 나는 답했다. 내 자식이었으면 내 성격에 엄청 괴롭히고 오늘 김장도 못 오고 학원 보내고 스트레스 줬겠지, 라며 내 성격을 아시기에 자식을 주지 않으신것도 다 하나님 뜻이라고 온 가족이 이구동성으로 찬성했다. 웃프게 들릴 수도 있지만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 매사에 그냥 보아 넘기는 법이 없는 내 성격에 자녀가 있었으면 아마 금쪽이네 상담소에 출연했을지도 모른다. 매이는 가족이  없기에 더 좋은 길,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길에 누구보다도 빠르고 가까울 수 있었던 지난 한 해 였음을 안다.


서유미 작가의 "토요일 아침의 로건"에 이런 문장이 있다. "기온이 떨어지고 바람이 불 때 마다 삶에서는 무언가가 떨어져나갔고 거울에 비친 그의 얼굴빛은 낙엽을 닮아갔다". 시간의 흐름에서 속수무책으로 사라져가는 우리의 존재적 한계에 대해 이토록 공감케 하는 문장이 있을까.



오늘도 그런 날들 중 하나였겠지만, 우리의 그릇에는 김장 장군 엄마의 김치가 가득담겼고,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간 좋은 것들이 조카들의 이제 막 시작하는 삶 안으로 담겼으니, 감사하기에 족한 주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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