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보고서 인생 18년을 돌아보며, 찔렸습니다. 중간보고를 하지 않은 채 무슨 비밀명기 제작자 마냥 혼자 보고서를 끌어안고 "한 방을 보여주겠어"라는 욕심으로 메주로 된장을 쑤던 지난 날들에 대해서 말입니다. 돌이켜보면 나의 상사들이 종종 저에게 했던 공통된 이야기 중 하나는 "지금까지 된 거라도 일단 가져와 봐"라는 것이었어요. 그 말을 들으면 저는 또, 내 나름대로 잡아가는 틀과 줄기가 있는데 중간에 훅하고 참견이 들어오네 하며 속이 부글부글 시끄러워지곤 했지요. 그 마음으로 저는 항상 "이만저만해서 좀 더 손을 보면 되니 조금 기다려 주세요" 하고 맞받아치고는 했었습니다. 저자 말대로, 한 방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지요. 이야~ 역시 썸머차장이야. 달라, 하는 경탄의 리액션 을 기대하며 말이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회사가 학교도 아니고 오구오구 잘했네 라고 칭찬받는 게 중요한 일도 아니며 그야말로 각자 해야 할 일을 적시에 적절하게 해서 돌아가게 하면 그만인 곳인데 말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최근 중차대한 보고서를 쓰던 그 때에는 수시로 윗 분께 중간보고를 하며 방향을 잡아갔었습니다. 그 때는 아이러니하게도 제가 그 보고서에서 곧 손을 떼기로 되어있던 차였기 때문에 칭찬을 독식하겠다는 욕심보다는 앞으로 남아서 일을 이어가게 될 윗 분과 아이디어를 수시로 공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해서였습니다. 아.뿔. 싸. 그 마음을 진작부터 가졌어야 했던 것인데...
깨달았습니다. 보고서를 쓸 때 어째서 검토배경, 현황, 개선방안, 기대효과, 이런 순서로 쓰는 것인지를. 그냥 회사에 들어오니 다들 그렇게 쓰고 있길래 저도 그렇게 써왔던 것인데, 이 순서야말로 우리가 누군가에게 썰을 풀 때 하는 무의식의 흐름과 일치하더군요. 검토배경이라는 건 쉽게 말해서, "우리 아까 하던 그 얘기 있지?" 하고 화두를 던지는 것이고, 현황은 "지금 상황이 이만저만 한 것 같아. 이건 정말 문제야"하고 전개하는 것이고, 개선방안과 기대효과는 "이거 이렇게 좀 바꿔보면 어떨까?" 에 관한 것이구요. 저는 그게 그런 취지인지 어떤지 진지한 고민없이 그냥 무조건 다들 하길래 한다는 식으로 판에 박힌 보고서를 썼던 것 같아요. 보고서는 내가 말하려는 "결론"(What)이 있어야 하고, 왜 그 결론이어야만 하는지 분석(Why)가 있어야 하고(수치이든, 데이터든), 그럼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대책 내지는 제안이나 요청(How)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의식의 흐름에 따르는 보고서 구조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저도 그렇고 많은 경우에 어마어마한 데이터를 의미없이 투입해서 장수를 늘릴 때가 많지요. 잘된 보고서는 결국 한 장에 설득력이 가득해서 보는 사람의 힘이 한 방에 딱! 전달되고, 무엇보다도 읽는 사람이 지겹지 않아야 하는데 말입니다.
아쉽습니다. 이 책을 조금 더 일찍 읽었더라면 보고서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고 영리하게 활용해서 피보고자들을 질리게 만들지 않을 수 있었을텐데. 일단 이 책을 회사 책꽂이에 꽃아놓고 우리 팀 보고서 작성의 노말로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후배들이 보고서 쓸 때 쌈박하게 목차 잡아주고 최대 2페이지를 넘지 않도록 작성하게 해서 두 번, 세 번 수정을 요구하지 않는 선배이자 내 자신이 그런 보고서를 써야되겠다, 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 책의 저자 박신영씨의 책은 입사 초년생 시절 어느 즈음에도 읽었던 적이 있는데, 그 때에는 전혀 깨닫지 못했던 바들을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온 오늘에 읽으니 느끼는 바가 많게 됩니다. 어느 덧 지구를 열두바퀴 반은 돌 만한 보고서를 써온 세월이지만, 그 세월을 겪은 사람이 읽어도 초심으로 돌아가기 좋은 책입니다. 뚝딱, 하루만에 읽으실 수도 있어요. 하트바구니 세 개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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