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만 나면 야근 후 부원들과 번개 치맥을 즐기시던 우리 부장님. 부장님을 중심으로 동그랗게 테이블에 모여앉아 있는 직원들을 향해 부장님이 한 때 버닝하던 단어는 "샤클턴!"이었습니다. "리더의 정신이라면 이래야지" 하시면서 "샤클턴, 샤클턴." 하시던 것이 기억에 남아 나도 언젠가 관리자로 승진을 하게 되면 제일 먼저 찾아읽어야 되겠다고 생각했던 책입니다. 한동안 정신을 쏙 빼 놓게 만들었던 방통대 기말고사 일정도 끝난 터라, 주말 하루 두문불출하고 한나절만에 완독할 수 있었습니다.
탐험대장 섀클턴과 대원 27명, 그리고 69마리의 썰매개는 1912년에 진수된 "인듀어런스"호를 타고 1914년 8월 5일 남극 탐험을 떠납니다. 출발 후 두달 만인 10월 9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했고, 11월 5일 사우스조지아섬의 포경기지를 경유하여 남극해로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곧 거대한 부빙군을 만나 발이 묶이게 되었고, 부빙들을 헤치며 배를 몰아 나아갔지만 결국 얼음 안에 꼼짝없이 갇히게 됩니다. "초콜릿 바 속에 박힌 아몬드처럼" 얼음 속에 박혀버린 것이지요.
1월 24일, 강풍이 가라앉자 고집 센 목수 맥니쉬는 이렇게 적었다.
"여전히 붙들려 있다. 길이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얼음의 압력은 심각한 문제다. 만약 빨리 빠져 나가지 못하면 여기서 벗어날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을 것 같다."
25일, "여전히 꼼짝 못한다. 얼음을 잘라내고 배를 빼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26일, "여전히 단단함. 우리 앞에 물이 조금 비쳤지만 우리를 가둬 놓은 부빙은 단단하기 그지 없다..."
27일, "여전히 단단하다. 우리는 또 얼음을 깨려고 시도했다...그리고 포기했다."
30일, "여전히 단단함..."
31일, "여전히 단단함..."
섀클턴의 위대한 항해 중에서(46쪽)
대원들은 거대한 부빙들에 갇힌 상태에서 겨울과 봄을 보냅니다. 기온이 올라가면서 얼음덩어리가 작은부빙들로 쪼개지면서 사방에서 배를 에워싸고 거대한 압력으로 배를 짓이기기 시작했습니다. 여름이 되어 기온이 올라가자 결국 인듀어런스호는 부빙의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출항한지 1년 만인 10월 24일 난파하게 됩니다. 대원들은 보트와 식량, 무기, 야영장비를 들고 배를 탈출하여 얼음 위에서의 기나긴 생활을 시작하지요. 축축한 얼음이 아닌 단단한 대지를 두 발로 밟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얼음 위에서의 날들을 살아냅니다. 살아남기 위해 결국 강아지 시절부터 주머니에 넣고 키웠던 썰매개들을 사살하기도 하고, 물개를 사냥하여 식량과 기름을 충당합니다. 딛고 서 있는 얼음이 수시로 쪼개지기 때문에 즉각적인 철수가 가능하도록 항상 교대로 깨어있어야 했습니다. 표류하는 부빙 위에서 대장 섀클턴은 "서쪽으로의 항해"라고 명명한 탈출루트를 계획하고, 부빙 위로 걸어 최대한 서쪽으로 이동한 후 240km를 육로로 걸어가서 포경선과 접촉하는 것을 목표로 정합니다.
추위, 동상, 그리고 얼음바다와의 사투를 벌이며 대원들은 마침내 서쪽으로 이동에 성공하게 돼요. 육지를 떠난 지 497일만에 비록 136평에 불과한 작은 섬이지만 더 이상 물에 떠 다닐 필요 없는 단단한 땅 위에 감격의 상륙을 합니다. 그러나 그곳은 너무나도 황량한 무인도였고, 오래 머무를 수 없었습니다. 섀클턴 대장을 비롯한 5명의 대원들이 다시 작은 보트를 타고 사우스 조지아섬으로 구조를 요청하러 떠나기로 합니다. 섀클턴은 남아있는 사람들을 부대장인 프랭크 와일드에게 맡기는 편지를 유서처럼 남기고, 고심 끝에 엄선한 5명의 선발대원과 함께 다시금 목숨을 건 보트 항해를 떠납니다. 섬에 남는 22명의 대원과, 떠나는 5명의 대원에게 모두 목숨을 건 도박의 시작이지요. 어니스트 섀클턴의 말 처럼 "성공하거나 아니면 죽을 것입니다". 섀클턴의 보트는 목숨을 건 항해 끝에 4개월만에 포경기지에 도달하고, 대형 목조 포경선 "서던 스카이호"를 타고 남아있는 대원들을 구조하러 돌아갑니다.
사우스조지아 섬까지의 보트 여행에서 내가 살아남지 못할 경우 당신은 대원들의 구조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보트가 이 섬을 떠나는 즉시 당신은 총 지휘를 맡게 될 것이며, 모든 대원들은 당신의 명령에 따를 것이다...나를 아는 사람들에게 나의 애정을 전해 줄 것과 내가 최선을 다했다는 말을 해주길 바란다.
1914년 4월 23일, 엘리펀트 섬에서
어니스트 섀클턴
이 기나긴 여정에서 27명의 대원들은 모두 가지 각색의 반응을 보입니다. 지나치게 낙관적인 사람, 혹은 지나치게 비관적인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속물근성이 있으며 어떤 사람은 도발적이고 반면 다른 누군가는 지나치게 위축된 사람도 있습니다. 리더란 그 모든 가지각색의 사람들을 위해서 "결정을 내리는 사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이 책을 읽고 알았습니다. 섀클턴은 탐험대의 대장으로서 탐험대 전체의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관찰하고, 고민하고, 결정을 내리고, 명령을 해야 했습니다. 몇년 전, 승진 소식을 들었던 그 때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던 적이 있습니다. 그간 고생했던 날들에 대한 소회와 이제 당분간 편히 지내도 된다는 안도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이유로 눈물을 흘려서는 안될 일이었습니다. 리더는 다름 아닌 누구보다도 일찍 일어나서 망을 보고, 정탐을 나가고, 가장 먼저 앞서 나가서 얼음을 깨고, 목숨을 건 정예 항해가 필요하다면 결정해서 마지막까지 이끌어야 하고, 그 와중에 한 명의 대원도 잃어버리지 않고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리더의 덕목과 능력이 내게 없음에 대해 눈물을 흘렸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업을 둘러싼 환경은 때로는 인듀어런스호를 둘러싼 부빙군 보다도 더욱 가혹할 때가 있습니다. 리더의 역할은 현란한 기술의 자랑이나 왕년자랑, 혹은 직원들의 환심 사기가 아닌, 그저, 결정을 내리는 일, 그리고 그 결과를 짊어지는 일, 그 뿐이라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결정을 내리지 않는 것이 때로는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것 보다 더욱 나쁜 것일 수 있으니까요. 언제나 쌈박한 결정을 쌈박하게 내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바래봅니다. 섀클턴 대장이 했던 것처럼, 마지막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리더이고 싶습니다. "다들 무사한가?" "다들 무사합니다."
어쨌든 그는 대장이었다. 그에겐 다가갈 수 없는, 뛰어넘을 수 없는 거리감이 있었다. 이러한 거리감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지위와 책임을 단 한순간도 잊을 수 없었다. 나머지 대원들이 생존의 궁리에서 잠시 벗어나 쉬는 동안에도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에겐 휴식도 도피처도 없었다. 책임은 오로지 혼자만의 몫이었다. (107p)
'읽은기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 읽을 생각에 들떠본 적 있다면, "닥치는대로 끌리는대로 오직 재미있게 이동진 독서법"(이동진, 2017.6월) (0) | 2021.11.24 |
---|---|
재테크 책인 줄 알고 읽었다가 한 방 맞은 기분, "부의 추월차선(엠제이 드마코, 2009.3월) (0) | 2021.11.21 |
어쩌면 끝나지 않을 싸움, "디플레전쟁"(홍춘욱, 2020.4월,♥♥♥) (1) | 2021.11.10 |
영혼없는 보고서에 영혼을 담는 법, "한 장 보고서의 정석"(2018.7월, ♥♥♥) (0) | 2021.11.07 |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레몬심리, 2019년) (0) | 2021.1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