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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영어 이상의 인생담론,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김민식, 2017년 1월,♥♥♥)

썸머에디션 2021. 10. 10. 21:54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 구사능력은 일종의 기술입니다. 그러니까, 어르신들께서 흔히 "기술 하나만 제대로 있으면 평생 먹고는 살어"라고 하실 때의 그 기술 말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외국어 기술이 과할 정도로 중요하게 여겨져서 한 개인의 수학능력과 각종 사회적 클라쓰까지 단정짓는 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어쨋든 엄연히 말하면 기술일 뿐입니다. 단지 기술이기에, 기술자들을 상대적으로 낮게 보았던 그 옛날 고려와 조선에서는 외국어 통역을 담당했던 "역관"들을 중인 신분으로 분류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쨋든 외국어 구사능력은 기술이기에 몸을 쓰는 운동이나 여타 손재주처럼 몸으로 익혀야 합니다. 오래 연습할 수록 좋고, 한번 제대로 몸에 익히면 평생 먹고는 살 수 있습니다.

1896년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했을 때 파견된 대한제국 사절단(앞줄 왼쪽부터 김득련, 윤치호, 민영환) 출처 : 은평시민신문(http://www.epnews.net)

기술을 향상시키는 데 무엇보다 효과적인 비결은 어떤 경우든 한결같은 마음, 즉 "항상심"입니다. 저자는 그 꾸준하고 한결같은 마음을 바탕으로,"일단 가벼운 회화 중심의 책을 한 권 달달 외워보고, 출퇴근 시간을 쪼개어서 좋아하는 팝송과 영어 팟캐스트를 듣고, 그 꾸준함에 싫증이 들지 않도록 오로지 재미있어서 빠져들 수 밖에 없는 주제의 원서읽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특히 인상적인 대목은 회화책을 읽을 때 나름대로 상황극을 설정해서 낭독해 보라는 것인데, 저는 이 부분에서 깊이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저 역시도 토플이나 아이엘츠에서 나오는 대화문을 들을 때 혼자 상황을 상상하며 키득거리곤 할 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도서관에서 사서와 학생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어쭈, 이 인간이 사서한테 은근히 들이대고 있네." 하며 말입니다.

MOTIZOVA VIA GETTY IMAGES

항상심, 끈기와 자존감, 그리고 싫지만 해야 하는 일(=필요needs에 의한 일)과 내 몸이 원하는 일(=욕구wants에 따르는 일)의 선후 순서를 정하는 결단과 같은 소소한 삶의 원칙과 루틴들은 비단 영어공부 뿐만 아니라 인생 전체를 살아가는데 있어서도 필요한 덕목들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는 저의 지나간 날들의 하찮았지만 꾸준했던 것에 대해 칭찬을 받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특히 이 책에 잠시 등장하는 노장 코메디언 조앤 리버스와 루이의 대화를 읽으며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난 18년 동안 직장을 그만두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호언하면서도 그만 둘 용기도, 어디 다른 곳으로 갈 능력도 없는 현실에 대해 자괴감을 느낄 때가 많았는데, 그래도 그 세월을 있어야 할 자리에서 꾹 참고 버티어 온 오늘에 대해 위로를 받는 것 같은 기분말입니다. "상황이 하도 거지"같지만 "그래도 그만두지" 않았고, "잘리는 거야 할 수 없지만 스스로 때려치우지" 않았고, "아무리 힘들어도 무조건 버티"었던 겁니다. 이런 버티기 끝에 상황이 좋아졌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나 자신은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확실히 믿을 수 있습니다. 바로 그 노장 코미디언이 말한 것 처럼이요. (I wish I could tell you it gets better. But it doesn't get better. You get better.) 영어공부에도 이러한 진리는 예외일 수 없겠지요.

미국의 전설적 여성 코미디언인 조앤 리버스가 성대수술 도증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끝내 깨어나지 못하고 4일(현지시간) 뉴욕의 병원에서 사망했다. NBC TV의 간판 토크쇼 '투나잇 쇼'에서 조앤(왼쪽)이 진행자 자니 카슨과 대담하는 모습으로 날짜는 나타나 있지 않다. (AP/NBC=연합뉴스)

지난 날들에 대한 격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해서도 왠지 모를 응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 나이에 영어공부에 그토록 천착하며, 영어시험을 보고 영어학원에 등록한다고 해서 뭣이 달라지겠는가만은, 적어도 그 꿈마저 그만두게 된다면 앞으로 영어를 쓰게 되는 일에 뛰어들 가능성은 완전히 제로가 되어버립니다. 훈련을 그만두면 올림픽 대표 선수로 선발될 가능성이 없어지는 것 처럼 말이지요. 그러니까, 항상심을 바탕으로 평생 먹고 살기 기술을 연마하다보면, 언젠가 나의 분야에서 나의 영어가 필요하게 될 그 길목에서 얼쩡거릴 수 있고, 운이 좋다면 쓰임받을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내가 원하는 어떤 길목에 서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 만으로도 삶은 풍성해지고 신이 나게 되니까요.

참고로 이 책을 읽고 나서 회화책 한 권 외우기에 도전하고 있는데요, EBS 파워잉글리쉬가 그 꾸준함을 지켜가기에 딱 좋은 책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 짧지도 길지도 않은 스크립트가 매일 업데이트 되면서 네이티브 스피커들의 표현을 익힐 수 있고, 무엇보다도 비타 500 5병은 잡수신 듯 상큼한 크리스틴 조 선생님의 목소리와 종종 소리내어 웃게 만드는 카메룬 선생님의 콜라보가 기분좋은 텐션을 가져다 주거든요. 이 책에 나오는 스크립트를 미리 다 외워놓고, 출퇴근길에 라디오 본방과 재방을 들으며 쉐도잉을 하는 루틴을 가져가고 있습니다. 다른 책에 새로 덤비기 전에 일단 파워잉글리쉬 한 권이라도 마르고 닳도록 외울 생각입니다. 뭐하러 그러냐고요? 파워잉글리쉬 한 권 외우지 않은 나와 한 권 외운 나는 분명히 다를테니까요. 김민식 PD님이 그랬던 것 처럼 말입니다.
단순히 영어비법 전수 그 이상의 감동이 있었기에, 하트바구니 세 개를 부어드리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