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소설 읽기는 대체로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책방”에 그 선택의 이유를 두고 있습니다.(이제는 팟캐스트를 더 이상 하지 않으셔서 얼마나 아쉬운지 모릅니다. 여전히 지나간 에피소드를 몇 번씩 듣고 있으니까요) 이 책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어느 날엔가 이동진 기자님이 언급하신, “우리는 누구나 자기만의 혼마에를 지니고 살아간다”는 문장에 끌려 두고두고 읽기를 별러왔던 책이에요.
그리스도인이라면, 특히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본질적으로 어떠한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았더라면 겪지 않았을 어떤 종류의 내면의 갈등을 겪게 됩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높은 이상을 보면서 받은 감화로 인한 모종의 사명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벗어날 수 없는 태생적 한계(또는 죄의 본성) 사이에서 늘 갈등하고 자책할 수 밖에 없게 되는데요.
두 젊은 포르투갈의 신부들은 그 높은 사명감으로 몇 개월에 걸친 목숨 건 항해 끝에 일본 땅에 도착합니다. 16세기 당시 일본 나가사키 지역에서는 외국인들의 포교활동에 대한 잔혹한 핍박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무서운 살육과 절박한 회유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오랫동안 침묵하셨습니다. 두 신부는 결국 좌절하고, 성화를 밟고 배교하고 맙니다. 그리고 성화를 밟는 의식으로 나타나는 배교의 과정에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습니다. “밟아라, 나를 밟아라.”고 하는.
나 역시도 내 인생에 그리스도의 도움의 손길이 간절했던 결정적 5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도움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 5분간의 그리스도의 침묵은 여전히 내 인생에 깊은 상처로 남아있습니다. 언젠가 그 분 앞에 섰을 때 제일 먼저 그 때 왜 침묵하셨는지부터 묻고야 말겠다고 꽤 오랫동안 생각했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 침묵의 섭리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내 삶의 어떤 물줄기가 있다면 그 온 우주적 침묵의 순간 전후로 물줄기의 흐름의 방향이 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변하기 전과 변한 후 어느것이 더 낫고 좋다의 문제는 아닙니다. 한 인간의 존재는 결국 그가 지닌 이야기라고 볼 때, 나에 관한 이야기가 그저 다르게 쓰여지기 시작한 기점이라고 해두는 편이 맞겠습니다. 이렇게 다르게 쓰여지기 시작한 내 삶의 작은 이야기가 신께서 써가는 거대한 역사의 작은 파편이라고 생각하면, 왠지 어째서 그때 침묵하셨던 거냐고 따져묻고 싶은 열기가 조금은 가라앉게 됩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로드리고의 말처럼, 기도는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을 구하고 요청하는 일이어서는 안되며 단지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이어야 하겠지만 우리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앞서 언급한 우리의 죄의 본성, 태생적 한계 때문이지요. 그래서 우리의 요구에 대해 그리스도가 침묵하시는 순간을 겪게 되면 그 분을 중심에 두고 차곡차곡 쌓아온 세계관이 통째로 흔들릴만큼 버겁고 괴로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말씀하십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은 지금 아플 것이다. 하지만 그 발의 아픔만으로 이제는 충분하다. 나는 너희와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겠다. 그것 때문에 내가 존재하니까.” 덧붙여 고백하자면, 저 역시도 그러한 침묵의 시간 이후 잠시 신앙을 떠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떤 날 우연히 요한복음 구절을 듣게 되었고, 자신을 배신하고 달아났던 제자들과 처음으로 재회한 그리스도께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이 그 어떤 말씀도 없이 단지 해변가에서 생선을 구워놓고 기다리고 계셨던 일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왠지 모를 깊은 감회로 신앙으로 돌아오게 된 기억 역시 잊을 수 없습니다.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스도가 침묵하시는 순간(또는 당신이 믿고 있는 어떤 것이든), 절대적 신념이 침묵하고 부재하는 진공의 시간을 겪고 나면, 그 때 비로소 각자의 “혼마에”를 밟고 이전과는 다른 존재가 되어 새로운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때로 당신 인생의 물줄기를 기어이 바꾸고야 마는, 당신 안의 혼마에는 과연 무엇인가요. 이 책이 주는 그 울림과 반향이 작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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