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를 읽고 나서 몇 가지 새로운 일들을 실행하게 되었는데 그 중 하나가 원서소설 읽기에요. 영어책 한 권 외워본 김민식 PD 님 왈 영어실력을 향상시키는 좋은 방법 중 하나가 본인이 좋아하고 재미를 느끼는 분야의 책을 영어로 읽어보라는 것이었어요. 실제로 제가 아는 분의 아들이 해리포터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한국말로 된 전권을 다 읽은 후 스스로 영어로 된 원서를 구해서 읽고, 그 다음에는 영화를 찾아보는데 원서를 하도 읽어서인지 자막이 없이도 영화 내용을 다 이해하더라는 겁니다. 결국 대단한 영어사교육 없이 명문 과학고에 입학했다고 하니, 영어읽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무슨 책을 사볼까 알라딘 홈페이지의 스크롤을 멍하니 내리다가 어릴 때 매우 좋아하던 아가사 크리스티나 셜로홈즈의 추리소설이 문득 땡기더군요. 소설 속의 그 으스스한 분위기에 압도되어서 방에서 혼자 읽다가 수시로 등 뒤를 돌아보곤 했었지요. 터질 듯한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서 중간의 긴 서사부분을 잘라먹고 결론 부분을 바로 읽어버리곤 했어요. 너무도 좋아했던 그 책들이 생각해보니 “메이드 인 UK”, 즉영어 본산지의 명작들인데 원서로 읽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도전한 책, “Murder on the Orient Express”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 입니다.
스탬불을 출발하여 파리까지 달리는 오리엔탈 특급열차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해요. 공교롭게도 열차는 갑작스레 내린 폭설오 눈더미에 갇혀서 꼼짝할 수 없는 상황이고, 이 열차에 우연히 탑승하게 된 푸아르 탐정이 놀라운 지력과 추리력으로 제한된 환경에서 범인을 찾아갑니다.
초딩 때 어린이 추리소설 시리즈로 읽었던 내용을 삼십년만에 원서로 접하니 완전히 새로운 내용이었어요. 어렸을 때는 ‘그래서, 누가 범인이야?’ 이게 제일 중요한 부분이었다면 지금은 포아르 탐정이 등장인물들을 차례로 심문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심리묘사와, 채집된 증거들을 모아서 모자이크처럼 맞춰나가는 과정이 더욱 흥미롭습니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orient express(오리엔트 특급열차)라는 자체가 상당히 독특한 소설 속의 분위기를 만듭니다. 등장인물들의 대화에 몰입해서 읽다보면 제가 1800년대 후반의 증기로 후끈한 객차 안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 들어요. 이 기차는 중간 중간 역에 설 때마다 유럽 각 도시에 출발한 객차들이 연결 합류되는 거대한 열차로 묘사가 되고 있어요.
이스탄불에서 파리까지 유럽대륙을 가로질러 달리는 열차 안에는 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스웨덴, 헝가리 등 다양한 국적의 승객들이 탑승해있어요. 소설 중간 중간에 불어가 등장할 만큼 불어가 공용어처럼 쓰이고, 예외적으로 불어를 못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 영어나 독일어를 사용합니다. 주인공 포아르 탐정은 당연히 이 여러 언어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있어요. 기껏해야 전라도와 경상도가 만나는 KTX 문화에서 살아온 저로썬 유럽의 거대한 대륙성이 새삼스럽게 크게 다가오는 부분이었어요. 그리고 재미있게도 모국어 외에는 외국어를 못하는 사람에 대한 은근한 비하가 종종 등장합니다.
We’ve travelled about. Mr. Ratchett wanted to see the world. He was hampered by knowing no languages.(우리는 여기저기 여행을 다녔어요. 래챗씨가 세상 구경을 하고 싶어했거든요. 외국어를 할 줄 몰라서 제약이 좀 있었죠.)
You’re apt to be done down if you speak nothing but good American. (할 줄 아는 언어가 미국말 뿐이라면,무시당하기 쉽상이죠.)
이렇게 한 대륙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다른 민족에 대해 지니고 있는 뿌리깊은 배척의식과 편견을 옅보는 것도 재미있어요. 이 소설이 쓰여진 당시의 미국은 모두가 동경하는 어떤 가능성의 나라, 그동안 가능하지 않았던 일들이 마침내 가능한 나라로 묘사되고 있는 것도 인상적입니다. 하지만 한 편으론 이 소설 사건의 모티브가 되는 끔찍한 유괴납치사건의 범인이 제대로 처벌되지 않았을만큼 정의가 살아있지 않은 나라라는 은밀한 비난이 깔려있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 범인은 어떻게 처벌될까요? 그건 이 소설의 핵심이자 폭발적 카타르시스를 가져다주는 클라이막스이며 스포일러이기 때문에 여기에 적을 수는 없어요. 다만, 그 범인에 대한 처단방식이 혹시 그 시대의, 혹은 아가사 크리스티가 지니고 있는 미국에 대한 여타 유럽국가들의 숨겨진 마음인가 하는 해석도 개인적으로 갖게 됩니다.
I don’t as a rule cotton to Britishers - they’re a stiff-necked lot.(나는 원칙적으로 영국인들하고는 상종하지 않습니다. 영국인들은 꽤 거만하거든요.)
And he is an Italian, and Italians use the knife! And they are great liars! I do not like Itaians.(왜냐면 그가 이탈리아인이기 때문이지. 이탈리아인들은 칼을 쓸 줄 알아. 그리고 대단한 사기꾼들이지. 나는 이탈리아인들이 싫어.)
“You’d learn a few go-ahead methods over there”, said Hardman. “Europe wants waking up. She’s half asleep.” “ It is true that America is the country of progress.” agreed Poirot. (“거기서 앞서가는 기술 몇 가지를 배웠군요.” 하드만이 말했다. “유럽은 깨어나야 합니다. 아직도 잠에 취해있어요.” 미국이 발전하는
나라인 건 맞습니다.” 포아르도 맞장구를 쳤다.)
여성에 대한 묘사는 어김없이 외모에 대한 상세한 서술로 이어집니다. 못생긴 여자에 대한 생생한 묘사와 예쁜 여자에 대한 화려한 찬사는 오히려 독자들로 하여금 누가 범인인지 추리해보는 과정을 미궁에 빠뜨리게 만드는 장치가 됩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여성의 외모에 관해서만큼은 유독 강력한 편견과 왜곡을 갖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아가사 크리스티 자신이 여성이었기에 이와 같은 고도의 심리전을 독자들과 벌일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Her eyes watche him curiously. Lovely eyes they were, dark and armond shaped, with very long black lashes that swept the exquisite pallor of her cheeks. Her lips, very scarlet, in the foreign fashion, were parted just a little. She looked exotic and beautiful.
(그녀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몬드 모양의 검고 사랑스러운 눈과 매우 긴 속눈썹은 그의 아름답도록 창백한 볼을 압도하였다. 이국적인 모습으로 자줏빛은 띄는 그녀의 입술은 약간 벌어져있었다. 그녀에게는 이국적인 아름다움이 있었다.)
Her small toad-like face looked even yellower than the day before. She was certainly ugly, and yet, like the toad, she had eyes like jewels, dark and imperious...
(두꺼비를 닮은 그녀의 얼굴은 전날 보다도 더 노랗게 보였다. 그녀는 확실히 못 생겼지만, 두꺼비와 같이 보석같이 빛나면서도 어둡고 권위있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현대식 추리물에서 보여지는 광활한 추격신이나 액션신은 전혀 없고 오로지 객차안의 좁은 통로를 오고가며 벌어지는 심문과 증거수집, 그리고 추리가 전부이지만, 영어원서로 읽으니 심문에 오고가는 깊이 있는 심리묘사나 대화들을 더욱 집중해서 보게 되었던 것 같아요. 마치 1930년대 유럽의 열차를 탄 손님이 되어 지난 일주일간 여행을 다녀온 것 같은 기분입니다. 여담이지만, 푸아르 탐정이 13명의 심문을 마치고 이렇게 심문내용을 깔끔하고도 구조적으로 정리한 대목에서는 심지어 저의 난삽하게 일하는 방식을 돌아보게 되기도 했구요.
추리물을 좋아하신다면, 동방열차 특급 살인사건 원서 읽기를 추천합니다. 원서로 읽으니 영어 근육이 살아나는 느낌이 들어요. 100년 전 유럽의 이국적인 분위기를 간접체험하는 즐거움도 덤으로 있고, 그 즐거움을 원서로 만나면 왠지 더 생생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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