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면 일을 시작하고 새벽에 눈을 감아야 일이 끝나던 그 시절. 자는 동안에는 꿈을 꾸면서 엑셀을 돌리고 낮에는 기린처럼 서서 잠을 자던 그 시절. 그 시절 나를 구원하는 유일한 시간은 바로 커피를 마시는 시간이었습니다. 카페인 민감증이 있어서 하루 한 잔을 넘게 마시지 못했던 제가 그 때 만큼은 하루 두어 잔을 마시곤 하였습니다. 어째서인지 커피를 마시는 그 순간 만큼은 상당히 이국적인 기분이 들었었거든요. 촌스러운 표현이지만 사실이 그랬습니다. 앞으로 일에 치이고 뒤로 성과에 치이던 고생스런 현장 속에서 커피 한 모금에 생뚱맞게 찾아오는 이질적이고 이국적인 기분은 상당히 중독성있는 탈출구였어요. 그것이 커피의 마력입니다. 회사에서 가장 훌륭한 실력으로 존경받던 선배님은 심지어 본인이 직접 커피원두를 로스팅하여 본인 이름을 딴 블렌딩으로 후배들에게 선물하여 주시곤 하였는데, 그런 걸 보면 커피의 위대한 마력은 저에게만 해당했던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사무실 근처에 커피집이 새롭게 오픈을 했는데 사람들 왈 "저 집 커피 원두가 정말 괜찮다"라는 것이었어요. 저는 커피 문외한이었지만 그 날따라 커피숍 분위기에 반해서 충동적으로 100g 짜리 원두를 한봉다리 구입합니다. 언젠가 옆자리 동료가 커피를 만들어 먹는다며 왠 과학 실험실마냥 비커에 깔대기에 유리막대 같은 것을 잔뜩 락커에 넣어두었던 것을 기억해내고 달려가서 빌려옵니다. 온갖 서류들로 지저분한 책상 구석에서 그라인더를 맷돌처럼 멍하니 돌리며 까만 콩이 서걱서걱 갈리는 것을 느끼고 있자니, 커피의 마력이 더욱 강력해져서 그 순간만큼은 제가 사무실이 아닌 어디 에디오피아에라도 와 있는 기분이 드는 것이었어요. 그 이후로 인터넷 서점을 뒤져서 구입한 책이 바로 "맛있는 커피를 집에서 내리는 책"이었습니다.
저자인 도미타 사나에씨는 일본 카페플래너 협회 회장이고, 각종 식품회사와 협업하여 상품 및 메뉴를 기획하였으며 여러 권의 저서를 낸 카페 전문가라고 합니다. 장인정신이 뛰어난 일본인 저자답게 그 내용이 꽤 디테일해요. 디테일하면 지루하기 마련인데 또 이상하게 지루하지 않습니다. 적절한 사진과 짧고 간결한 서술의 흐름 때문일까요. 번역도 잘 되어서 경우에 따라 한국의 실정에 맞게 적절히 편집된 부분도 있습니다. 그윽한 커피그림과 친절한 설명이 가득한 이 책을 읽고 나서 저는 피곤한 까페 손님이 되어버렸어요. 체인형 까페보다는 로컬 까페를 주로 가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왠만하면 스페셜티 커피가 메뉴에 포함된 집으로 갑니다. 원두를 살 때 가급적 로스팅 일자를 확인하고, 스타벅스 원두 밖에 몰랐던 제가 "과테말라 SHB, 만델링 G1" 인지 내용을 읽어봅니다. 라이트 포스팅인지 미디엄 로스팅인지 다크로스팅인지, 예전엔 쳐다도 보지 않던 포장지 겉면도 살펴보게 되었어요.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수동그라인더를 샀어요. 끓는 물을 바로 들이붓는 것이 아니라 퐁퐁 끓어올라오는 물을 한템포 식혀서 씁니다. 항상 먼저 50초 정도 뜸을 들이는 시간을 가지고, 추출은 신속하게 빠르게 끝내려고 하며, 보약 짜내듯 마지막 추출물까지 짜내는 습관은 그만두었어요. 원두를 보관하기 위해 진공 보관용기를 구하기도 했네요. 그런 작은 노력을 통해 신선한 원두 분쇄가루에 처음으로 물을 붓는 그 순간 뽀르르 부풀어 오르며 깊은 커피향이 퍼지면, 아, 좋다, 하며 미시적 행복의 최대치를 느끼곤 합니다.
커피를 내린다고 하면 무조건 거름종이로 하는 줄 알았는데 페이퍼드립, 융 드립, 사이펀 드립 등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어요. 페이퍼드립만 해도 칼리타, 멜리타, 하리오 등 드리퍼 제작회사에 따라 여러가지 종류가 있고, 드리퍼 표면에 있는 빗살무늬같은 홈들이 아무 의미없이 있는게 아니라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바리스타 친구에게 이야기하니 "칼리타식 드리퍼"를 쓰라고 가져다 주더군요(가장 흔한가 봅니다). 조금 더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이 책에 나온대로 커피의 맛에 어우러지는 커피잔도 골라보고, 내 커피에 직접 넣을 설탕조림도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이 외에도 카페오레, 비엔나커피부터 잉글리시스타일커피, 카페 콘 레체 등 여러가지 베리에이션을 만드는 레시피가 수록되어 있고, 맛있는 원두 주문하는 방법에서 바리스타 되는 절차까지 정리되어 있어서 커피에 대한 궁금증을 왠만하면 해결할 수 있어요. 물론 책만 읽고 바리스타가 될 수 있다면 아마 모두가 바리스타일겁니다. 다른 일만큼이나 공을 들여 연습해야 하는 일이고, 저는 아직 커피내리기 만큼이나 배우고 싶은 다른 일들이 줄줄히 있어서 본격적으로 뛰어들지는 못하지만, 주어진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는 한번쯤 커피 배우기를 시도해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제 서투른 기술로 소규모 모임자리에서 커피를 분쇄하여 내려먹어도 다들 굉장히 기분좋아하더라구요. 맛있게 내리는 기술까지 있으면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요긴하게 사용될 수 있을 것 같아요.그 전까지는, 이토록 맛있는 커피를 추출하는 최상급 바리스타님들을 마음껏 존경하며 지내려구요.
페이지를 넘길 때 마다 커피향이 나는 듯하여 그냥 읽는 것 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책이었습니다. 오미크론으로 뒤숭숭한 요즘, 나만의 아늑한 집에서 모처럼 홈까페 차려놓고 기억에서 가물가물한 부분들을 다시 찾아 읽어보아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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