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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흐름을 닮은 카페에서 레이달리오를 읽다

썸머에디션 2023. 2. 4. 19:37

호수라고 믿어버릴 만큼 고요한 사천의 남해바다. 블루실크를 닮은 그 바다 앞 도로 곁에 연남동스러운 까페가 하나있습니다. 이에이에프. Ebb and flow, 즉 조수가 밀려들어왔다가 쓸려나가는 흐름을 의미하는 표현에서 카페 이름을 따 왔다고 하네요.


빛 바랜 횟집 간판들과, 먼지가 앉은 경양식집과, 짖지 앉는 백구와, 숨지 않는 고양이가 있는 호젓한 해안가 골목에, 마치 다른 공간으로 순간 이동하듯 하얀색 까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조수의 들고 낢을 닮은 휴식이 있는 공간이기를 바란다고 적혀있는 코스터처럼, 그 의도에 충실하게 의자와 테이블, 음악, 베이커리, 그리고 와인 디스플레이까지 그 어느 것 하나 모난 구석 없이 하나의 컨셉을 중심으로 미니멀하면서도 일관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시원스러운 테이블 귀퉁이에 앉아 레이 달리오의 "변화하는 세계질서" 3장을 펼쳤습니다. 저는 3년 전 코로나 팬데믹 초창기 고꾸라지는 경제지표를 보며 뜬금없는 결단력으로 서둘러 우량자산을 처분하는 바람에 곧이어 찾아온 자산 폭발 상승의 기회를 놓쳤더랬죠. 반면 버블의 정점이었던 재작년에는, 애진작에 팔았어야 하는 중급자산을 끌어안고 엉뚱한 대박 꿈만 꾸며 미적거리다가 결국 깡통주택 처지가 되었습니다. 거대한 흐름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으니 달리는 말 등에 올라타야 할지도, 침몰하는 배에서 내려야 할지도 알지 못했던 지난 날들.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은 치명적 실기입니다.



하나의 경제질서는 통화와 신용의 팽창과 수축양상을 번갈아 보이며 사이클을 겪습니다. 부침을 거듭하는 45년~80년 주기의 장기사이클이 있고 8년 주기의 단기사이클이 있다고 하네요. 인간은 그 생이 짧아 웬만하면 대공황과 같은 장기사이클을 겪는 일이 없다보니 부와 권력질서가 완전히 재편될 수 있다는 생각조차 잘 못한다고 합니다. 1945년에 브레튼우즈 체제 탄생으로 새로운 질서가 재편된 후 통화와 신용의 팽창 속에서 어느덧 85년이 지났고, 코로나 위기 속 연준이 찍어내는 달러 돈으로 통화와 신용이 폭증하였으며, 그리고 그 후폭풍으로 우리는 지금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어요. 장기사이클의 막바지에 와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찍어낸 세계의 돈인 달러로 떠받친 질서, 그리고 통화가치의 급격한 하락. 여러가지 현상들이 지금 우리가 처한 단계를 짐작케 합니다. 최근의 테이퍼링 속 단기적으로 달러가 오르긴 했지만, 팽창된 신용이 제거되기 전까지 달러는 계속해서 그 가치하락으로 약세를 면치 못할테고, 결국 구매력 기능을 상실할 지도 모를 법정통화를 대신하여 금화, 은화라도 안방 금고에 쌓아두어야 하는 건 아닐까요. 부동산 역시 이제 통화가 만들어낸 거품은 거둬지고, 본연의 가치에 충실한 가격으로 돌아갈테고요.



레이달리오의 사이클은 어디까지나 기축통화를 양껏 맘껏 찍어낼 수 있는 천조국 미국 중심의 분석에 기반하니, "돈을 찍어낸다"는 개념조차 생소한 非기축통화국 소시민에게 그 부침의 임팩트는 얼마나 크게 작용하게 될까요. 내가 오늘 먹는 이 유달리 바삭한 크로와상을 매개로 그 생계가 연결되어 있을 누군가의 안위를 갑자기 묻고 싶어집니다. 그 쪽은, 살림살이 안녕하신지요.



까페 홀이 소음이 많이 울리는 편이에요. 아이동반 가족단위 손님들의 유아용 태블릿 음악 소리에 탁월한 취향으로 선곡했음이 틀림없을 까페 음악도 묻혀버렸고, 책을 읽기에는 시끄러웠던 게 다소 아쉬웠습니다. 다음에는 아침 오픈 시간의 조용함을 노려, 이 길가에 접한 별실의 따땃한 햇살에서 책을 읽어봐야겠습니다. 조용한 바닷 속 깊이 조류가 소용돌이 치듯, 거대한 세계질서를 흔드는 난류 속에서 나는 과연 순항할 지 난항할 지, 그것이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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