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은 어김없이 승진인사 시즌과 함께 찾아옵니다. 누군가는 환희로 이 시기를 통과할테고, 누군가는 절망으로 남겨질테지요. 오징어게임이 어디 다른 곳에서 펼쳐지는 게 아니라 우리가 매일 일하는 현장이 바로 그 구슬치기 골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두 승진의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앞-뒤-옆 따지지 않고 전력질주합니다. 그러다가 게임이 끝나면 한숨을 쉬며 말하지요. “내 다시는 이런 진흙탕 속에 들어가나 봐라”,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매번, 개임의 새로운 리그가 시작될 때 마다 자발적으로 돌아와서 참가하는 것은 다름아닌 우리 자신입니다. 오징어게임의 참가자들이 그러했듯 말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달리 생각해보면, 아웅다웅 피 튀기는 오징어게임 셋트장 너머에는 푸르고 넓다른 광활한 세계가 있습니다. “퇴사하겠습니다”의 저자 이나가키 에미코씨는 일본 굴지의 메이저 일간지인 아사히신문에서 38년을 근속하고, 51살이 되던 해에 그 광활한 세계로 훌훌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 세계에서 맞닥뜨린 자기 자신과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에미코씨는 자신이 다니던 회사 아사히 신문을 사랑해마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좋은 성적으로 훌륭한 학교에 다녔고, 꿈꾸던 기자가 되었고, 그것도 일본 최고의 신문사에서 즐겁게 일했던 더할 나위 없는 삶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흔 살이 되던 해에 인생의 반환점을 돌았다는 자각을 하면서 마음 한켠에 회사를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어왔고, 그 마음을 먹은지 10년이 지난 51살에 정말로 회사를 관두게 됩니다. 일이 그렇게 흘러가도록 만든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었습니다. 갑작스레 오사카라는 대도시에서 지방총국으로 발령나면서 마음에 약간의 데미지를 입었고, 한 때 후배였던 기자가 이제 더 높은 상위직이 되어서 자신의 기사 초고를 고치기도 합니다. 점차 연차가 높아질 수록 회사가 참을성 있게 나의 “치기”를 참아주는 것이 아니라 이제 나를 “선별”하는 무서운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토록 사랑하던 기자의 쓰는 일에 이제 괴로움을 느낍니다. 그러던 차에 아사히 신문이 잘못된 기사로 큰 스캔들에 휘말리게 되자, 에미코씨는 아사히신문의 제호 아래 기사를 써 낼 의욕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어려움에 처한 회사를 살리기 위해 더 이상 아쉬움이 없을 만큼 일을 한 에미코씨는 때가 되자 훌훌 회사를 떠납니다. 이직도 아니고 재취업도 아닌, 정말로 순수한 무직의 상태, 백수로 자발적으로 전환한 것이지요.

‘회사란, 조직과 개인의 전쟁터’라는 생각을 품게 되었습니다. 조직은 강합니다. 하지만 강하기에 한편으론 약하기도 합니다. 좋은 게 좋은 거다, 줄을 잘 서라 등등. 인간의 본질적인 욕망과 나약함이 집단이 되면서 곧바로 가시화되고, 조직 그 자체를 좀먹습니다.
이를 막는 것은 개인의 힘밖에 없습니다. 혼자서 판단하고, 혼자서 책임을 지며, 혼자서 움직입니다. 작은 힘입니다만, 자기 혼자 결단하기만 하면,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약하지만 강합니다.
물론 조직의 논리가 늘 틀린 것도, 개인의 논리가 늘 옳은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 쌍방의 역학관계가 팽팽히 맞서는 곳이야말로 ‘좋은 회사’가 아닐까요? 문제는, 내가 회사에 속해있으면서도 독립된 개인으로 우뚝 설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언제든 회사를 그만 둘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나가키 에미코 [퇴사하겠습니다]
회사 밖으로 나온 에미코씨는 핸드폰 대리점에서 난생처음 통신사에 가입하는 절차를 거치고는 그만 그 복잡함에 앓아누워 버립니다. 그리고 생각하지요. 이 세상은 다름아닌 “회사사회”라는 것을, 회사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누려왔는지를요. 회사에서 주는 연금, 회사에서 대신 가입해주었던 핸드폰, 회사에서 대신 얻어주었던 집 등등. 심지어 국가도 국가의 역할을 상당부분 회사에 위임하고 있는 셈이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회사사회에서 회사원이 아닌 사람은 생존할 수 없는 것인가! 에미코씨는 퇴사 이후의 삶이 갖게 될 문제의 본질은 돈 문제가 아니라 사실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나 자신의 상식을 얼마나 뒤집을 수 있는가의 문제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그간 아무 생각없이 살아온 소비 지향적 라이프 스타일을 극강의 미니멀라이프로 바꿔나가기 시작합니다.

무언가를 없애면 거기에 아무것도 없게 되는 아니라, 그곳에 또 다른 세계가 나타납니다. 그것은 원래 거기에 있었지만 무언가가 있음으로 인해 보이지 않았던, 혹은 보려고 하지 않았던 세계입니다.
회사를 그만두면 무엇을 하든, 무슨 명함을 내밀든, 나는 자유입니다. 뮤지션이든 아티스트든 카메라맨이든, 뭐든 될 수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자칭’이긴 합니다만, 그게 뭐 어때? 하고 배짱 있게 나가면 될 일입니다. 퉁소나 하모니카를 열심히 부는 뮤지션이 있어도 되는 거잖아요? 뭐 그걸로 먹고살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스스로 납득할 수만 있다면, 자기 명함은 자기 뜻대로 만드는 것 아닌가요? 누구 눈치를 볼 것도 없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멈춰지지 않더군요!
이나가키 에미코 [퇴사하겠습니다]
에미코씨는 이제 자유기고가로서 이전에 비하면 택도 없는 수당을 받으며 살아가지만 훨씬 더 친구가 많아지고 즐겁다고 합니다. 인생은 훨씬 자유로워지고 빛이 나게 되었어요. 아프로헤어로 머리를 빠글빠글 파마한 그녀는 이제 동네 인기 아줌마가 되었습니다. 목욕탕에서 할머니들과 정성들여 사귐을 갖고, 길에서 만난 청년과 대화를 나누며, 저녁은 늘 소소한 요리를 해 먹습니다. 회사원 시절 안중에도 없었던 사람과의 연결고리, 그것이 이제 매일의 화두가 되었습니다.
내일 일은 알 수 없습니다. 다시 만날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생은 순간순간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지는 법입니다. 좋은 사람을 돕고 도움을 받으며 이어지는 순간이 있다면, 더 이상 무엇을 바랄까요. 이렇게 생각하기에 나는 지금, 오픈 마인드입니다. 그래서 걷고만 있어도 인기가 있습니다. 무척이나 많은 사람들이 말을 걸어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대체로 재미있습니다. 사람들은 의외로 예민한 센서를 가지고 있고, 또 전파는 자연스레 동기화할 수 있는 상대를 늘 찾고 있습니다. 다만 집단 속에 있을 때에는 그 센서가 둔해지고 전파도 약해집니다. 그래서 회사원은 다른 사람들과 연결고리를 찾는 게 서툰 거죠.
이나가키 에미코 [퇴사하겠습니다]
그녀는 결코 회사를 원망하거나 되갚아주는 듯한 마음으로 떠나지 않았습니다. 회사는 나를 만들어가는 곳이지 내가 의존할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회사만큼 멋진 곳이 없다고 그녀는 이야기합니다. 무직인 지금도 전 직장에 대해 “나의 사랑하는 아사히”라고 말함에 주저함이 없습니다. 다만 어느날 불현듯 찾아온 퇴사의 예감을 놓지 않았고, 회사에 더 이상 줄 것도 받을 것도 없다는 자기 확신이 들던 어느날 오롯한 자기 결단으로 상쾌하게 회사를 떠났고, 고대 인도인들이 말하는 “임주기(자녀교육 등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마친 이후 숲에 사는 시기)”의 삶을 살고 있는 것 뿐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퇴사의 이야기가 아닌, 한 인간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어른식 성장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여전히 저는 불쑥 불쑥 퇴사를 운운합니다. 언제는 연봉이 적어서, 언제는 일이 맞지 않아서, 언제는 이런 오징어게임같은 문화가 싫어서. 암만 그렇더라도, 그래서 진짜 떠나더라도, 나를 사람답게 만들어 준 회사에 대해 더 이상 줄 것도 받을 것도 없이 사랑만을 안고 떠날 수 있는 그 단계에 내가 이르렀는가, 돌아보게 됩니다. 그 때를 기다리면서, 그리고 이 회사생활의 마침표를 찍게 될 그 때가 반드시 오게 되도록 만드는 그 과정 안에서 “어른의 성장”을 하게 될 것임을 이 책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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