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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새로운 반려자전거, “만추”(진주라이딩, 2017년)

썸머에디션 2018. 10. 14. 01:41

드디어 주문한 전기자전거가 자전거포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낮 2시 17분. 지난 주 연이틀 밤을 새며 근무한 바람에 24시간 자고 싶었지만, 불굴의 의지로 침대의 마수를 떨쳐내고 분기탱천. 쫄바지와 헬멧을 착용하고 가게로 향했습니다. 자전거, 전기충전기, 교체용 안장을 받아들고, 라이딩용 배낭까지 그 자리에서 구매하여 착장한 후, 척척 걸어나와 16km의 라이딩으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마흔을 곧 바라보는 늙은 딸은 늘 네로황제처럼 길게 누워 예능프로 섭렵하기가 유일한 취미였습니다. 그런 딸이 행여나 팔다리가 퇴화되어 카프카의 변신처럼 벌레가 되어버리지는 않을까 할머니가 된 엄마는 늘 걱정이었어요. 그러던 딸이 갑자기 자전거를 잡고 서너시간씩 돌아다니다 오니, 엄마는 그래그래, 그거라도 해, 하며 반가워했습니다. 팔다리 퇴화직전의 네로 딸을 밖으로 잡아 끈건, 다름아닌 전기자전거였습니다. 처음 타 본 전기자전거는 신세계였어요. 몇 번의 페달링이면 휘융하고 튀어나가는데다가, 결정적으로 가파른 오르막길에서도 기어를 내리고 속도계를 올리면 평지에서처럼 휘융휘융 치고나는 것이었습니다. 자전거로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그 기분을 그토록 사랑하면서도 막상 오르막의 “끌바”가 싫어서 자전거에게 매정히 퇴짜를 놓고 녹슨 고철로 만들어버린 내 입장에선 정말로 찰떡같은 반쪽을 만난 기분이었지요.

 

눈부시게 아름다워서 어딘가에 택배로 선물보내고 싶었던 길 @ 진주 남강변 라이딩



지금으로부터 10년전엔가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이라는 책을 읽고 나도 언젠가는 해봐야 겠다고 꿈꾸었던 적이 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미국대륙을 횡단한 여행기였는데, 당시에는 지금처럼 보통사람의 여행책이 흔치 않았던데다가 취미로 하는 라이딩도 이제 막 태동하던 때였고, 개인적으로는 20대 특유의 모험욕구가 발동하던 시절이었으므로 내리막길을 달리는 라이딩마냥 단숨에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하긴, 메이저 신문사 기자출신에 당시 네이버 홍보담당 팀장님이라는 프로필을 소유한 저자의 자전거 여행기는, 절대로 보통사람의 평범한 여행책 일 수 없었을테지만요. 나 역시도 그런 특별한 경험을 하면서 보통사람이면서도 비범하게 살고 싶어했던 시절, 그 시절의 세계를 떠올려보면 항상 푸릇푸릇한 냄새가 납니다.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홍은택 지음)



그 이후 저에게는 2~3가지의 불운이 연이어 찾아왔고, 그 시기를 통과하고 나니 사람이 좀 달라져버렸습니다. 비범한 보통사람이 되기는 커녕 지극히 평범한 사람으로 대과없이 산다는 것 조차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을 알았고, 과감한 모험을 하는 사람들을 무책임하게 보기 시작했고, 무엇보다도 다시는 똑같은 불운을 겪지 않으려는 필사의 “노오력”으로 사는 사람이 되었지요. 그랬더니 주위 사람들로부터 미더움을 조금이나마 얻기 시작했지만, 반대로 자전거 여행 같은 건 완전히 잊혀져갔습니다. 그렇게 10년이 갔네요. 이제 나이가 들어 더는 볼 TV도 없고 친구들이 거의 다 결혼을 해 버리고 나니 딱히 만날 일도 없어 난감한 이 때에 어떤 천재들이 전기자전거를 떡하니 만들어 낸 것입니다.

나는 한가을에 만난 내 전기자전거에 “만추”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나의 새 반려자전거 만추와 함께, 만번의 추력을 붙여 가득히 차오른 가을을 달릴 계획입니다. 다음 주에는 통영으로, 그 다음 주에는 부산으로, 그 다음에는 서울로. 한번의 페달링이 더해질때마다 잃어버린 많은 것들이 돌아오면 좋겠습니다. 평범한 사람으로써 남몰래 가져보고 싶었던 비범함과, 그 때의 푸릇푸릇했던 냄새와, 아메리카 자전거 횡단의 꿈 같은 것들 말입니다.

푸르른 유럽의 도시를 달렸던 기분 @ 경상대학교 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