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기록

8월 첫째주_바람에 관하여

썸머에디션 2026. 8. 9. 21:18


나는 바람을 좋아한다. 바람이 숲 위로 지나가는 순간은 놓칠 수 없는 장관이다.

바람불던 숲



나는 왜 바람이 좋을까. 내 성격이 거시기 해서인가. 내가 먼저 일을 벌인다거나, 모임을 시작한다거나, 사람에게 다가가는 시도를 하지 않는 지독히도 수동적인 내향인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그저 한 자리에 가만히 있어도 모든 것이 달라진 것 처럼 느끼게 해 주는 바람을 좋아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바람불던 길



수동형의 나에게 인생의 중요한 일들은 대개 내 안이 아닌 외부에서 불어온 바람으로 시작되고 멈춰졌다. 때로는 사람 바람이기도 했고, 때로는 일 바람이기도 했고, 때로는 노는 바람이기도 했던 그 바람이 나를 밀어야 나는 움직였고 그 바람이 나를 끌어야 나는 일어났다.



바람쏘이던 두 분의 뒷모습이 so lovely



나는 왜 바람이 좋을까. 바람은 우리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끼게 해준다. 바람이 불면 나는 새삼 자각한다. 오늘이 어제가 되고, 내일이 오늘이 되고 있구나. 시간이 흘러간다는 진리가 손에 잡히는 물리적 현상이 되어서 찾아오는 것이 바람이고, 그 바람이 불면 나는 지나간 일들과 사람들을 생각한다.




바람불던 독산성




살면서 한번도 본 적 없는 38, 39의 숫자들이 온도계에 표시되는 것을 보며 공포까지 느꼈던 몇일이었다. 나름 환경주의자로써 에어컨을 내리 켜는 것에 대한 죄책감과, 곤죽처럼 늘어져 있는 9살 노묘들의 건강에 대한 걱정 사이에서 갈등하며 매일을 보내야했다.

바람을 모르는 늘어진 고양님




오늘도 버틸 때까지 버틴 후 에어컨을 켤까 말까 망설이며 창 밖을 보던 중, 숲 위로 지나가는 한 무리의 바람을 보고 고양이들에게 말했다. "애기들아, 저거봐라. 바람분다."

바람불던 숲 2



열기 속에 호흡을 잡지 못해 실신 지경에 이르렀던 지난 주 러닝 이후 줄곧 트레드밀에서 달렸는데, 지나가는 바람을 확인하고 아침시간에 나가서 6km를 성공리에 뛰었다. 다행히 뛰는 내내 바람이 불었고, 햇볕과 더불어 매미가 기상하기 전에 러닝을 마쳤다.

바람불던 달리기길 🏃‍♀️ 🏃‍♂️ 🏃‍♀️





후쿠오카에 다녀온 이후 후르츠산도병에 단단히 걸려서 동네를 수색했다. 하여, 드디어 찾아낸 멜론 산도를 블루보틀 핸드드립에 곁들여 먹었다. Thanks to 쿠다산도. 가장 뜨거웠던 날 복더위 속에서도 기꺼이 산도를 팔아주신 덕분에 후쿠오카 2탄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최고령일 것 같은데 만학 CFA level2 수험생으로서 프로 방해냥들의 훼방을 몰아내며 한 주 만에 Equity 1회독을 깔끔하게 클리어 하는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정말 토가 나올 것 같았다_)

프로 훼방냥 선생님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간다는 전도서 말씀이 있다. 또한 바람이 임의로 불어서 우리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그러하다는 요한복음 말씀도 있다. 그만큼 바람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것들 - 그러니까 지나온 것들에 대한 위로, 계속 나아가야 할 비결,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믿음같은 것들이 담겨있다.


극한의 열기 끝에 드디어 바람이 불고 있다. 더불어, 늘 소원했던 대로 고요하면서도 단정했으나 여러가지로 뜨겁고 열심이었던 나의 귀한 여름도 조금씩 다음의 세계로 넘어가고 있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텅 빈 풍경이 불어온다 🎶